닷소 구시가지 Tarsus old town
이재성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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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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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3자리코드 ctCode | ATO |
한글 도시명 ctKname | 아테네 |
영문 도시명 ctEname | ATHENS |
국가 2자리코드 code2 | TR |
유엔 구분 un_subregion | Western Asia |
국가명 한글 country_kname | 튀르키예 |
한글설명 expl | 바울의 고향 다소는 현재는 타르수스(Tarsus)라고 불리우는데 터키의 남동부 지역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던 화려한 항구도시였으며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지중해에서 15㎞의 내륙에 위치한 도시이다.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유적들은 지하 15~20미터 이하에 뭍혀 있으며 지금은 그 화려했던 면모를 잃은 작은 도시로 남아 있다. 바울이 자신의 고향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행 21:39)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이 살던 시대에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적으로 아주 발전된 도시였다. 다소는 동서를 잇고 바다가에 발달된 도시로서 히타이트,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로마. 비잔틴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제국들의 중요 도시였다.바울의 고향 다소는 현재는 타르수스(Tarsus)라고 불리우는데 터키의 남동부 지역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던 화려한 항구도시였으며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지중해에서 15㎞의 내륙에 위치한 도시이다.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유적들은 지하 15~20미터 이하에 뭍혀 있으며 지금은 그 화려했던 면모를 잃은 작은 도시로 남아 있다. 바울이 자신의 고향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행 21:39)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이 살던 시대에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적으로 아주 발전된 도시였다. 다소는 동서를 잇고 바다가에 발달된 도시로서 히타이트,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로마. 비잔틴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제국들의 중요 도시였다. 다소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사도 바울의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예수께서 탄생하신 몇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며 주후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했다.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예수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신약 27권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이 사도 바울과 관련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그는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험한 산을 넘고 태산 같은 파도를 헤치며 때로는 감옥에 갇히면서도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사도의 길을 충성스럽게 걸었다. 또 신체적 불치병을 지니고도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의 학식 또한 기독교의 기초를 굳히는 데 크게 공헌했는데, 기독교 신학은 바울에 의해서 틀이 잡혔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은 어느 성지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다\"(행21:39) 하고 말한다. \'...소읍이 아닌...\' 구절은 다소가 결코 평범한 도시가 아니며,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시임을 암시한다. 다소의 현재 인구가 약 8만인데, 그 당시는 인구 50만 명을 자랑하는 도시로서 지중해 지역 어느 도시도 다소보다 크지 않았다. 다소는 로마시대 길리기아 지역의 정치적 수도요,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고장 사람이 일반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대학도시였다. 또 지중해에 있는 떠들썩한 상업 도시이자 분주한 왕래가 일상이던 항구도시였다. 천연 요새인 다소 항은 키두누스 강이 지중해로 흐르고 북쪽은 타우러스 산을 포함하여 산맥으로 둘렀다. 풍부한 광물자원과 목재 또한 무역항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특산물은 아마 원자재와 염소 털로 짠 직물이 유명하여 직조업과 천막제조업이 성행했다. 당시 천막제조업은 바울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행18:3). 사도 바울의 고향집 우물사진에서 보듯이 우물은 도르래를 움직여 함석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우물의 깊이는 약 38m로 당장 물을 길어 우물물을 마실 수 있다. 순례자들은 오래된 우물이라 혹시라도 물을 마신 후 배탈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만,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막16:18)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믿음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