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
의성의 시간을 찾아서(1)

예천 말무덤.
예천 말무덤.

 3년 전 강의 관계로 의성을 찾았다. 그때 만났던 의성은 조문국이라는 고대국가의 모습으로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른 만큼 의성을 가지 않고도 그곳을 기억하는 또 다른 기제는 바로 컬링이라는 빙상 경기였다. 전국 유일하게 의성에서만 양성되었다는 컬링선수들이 내놓았던 혼연일체의 경기는 전국민을 넘어 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유발했던 터였다. 그 요람이 의성이었다는 점에 또 마음이 끌렸다.

 하여튼 지난 월요일 칠곡과 끊임없이 땅을 제금나누며 살아온 대구 북구에 문화도시와 관련한 포럼이 있어 찾았다. 자기 동네의 정체성에 근원하지 않는 도시는 주민들도 동의하기 어렵고 어떤 위대한 포부와 비전을 설정해도 함께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로 문화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문화도시에 대한 상상을 현실적인 상황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의성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후 세시가 의성의 탑리역에서 모임이 있으니, 비워진 시간에 의성을 둘러 볼 요량이었다.

 해가 뉘엿거리는 시간 의성의 고운사를 향했다.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뒤를 이어 고운 최치원이 불사에 참여하고, 도선국사가 중창했다고 하니 이 땅에서 가장 늙은 사찰중의 하나일 것이다.

 3년 전에 들른다 하면서 지난해에도 스치기만 했던 그 절을 찾아 갔는데 심심산골인지라 어둠이 일찍 밀려왔다. 여섯시반 경에 도착했는데 산문은 적요 그 자체였다. 마치 별빛 보호지구 같은 느낌의 경내는 발자국 소리가 법고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스스로 퇴각을 결정했다. 

막걸리가 솟던 샘.
막걸리가 솟던 샘.

새벽 별빛 속 고운사…스스로 퇴각하다

 내일 다시 오자는 생각으로 물러서고, 차를 돌려 의성읍내로 향했다. 읍내는 산중과는 사뭇 달랐다. 번쩍거리는 군청 주변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를 찾으려 차를 한켠에 두고 지갑을 찾았다. 아뿔사 지갑이 어디 흘렀나 호주머니에서 종적을 감췄다. 렌턴을 들고 차량 내부를 이잡듯이 둘러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지갑은 없다. 어제 출발하며 챙기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공식행사 때문에 점퍼와 양복을 갈아 입으며 흘렸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현금은 다행이 좀 있다. 이걸로 버티어 보자 라고 생각하고 근처에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 방을 찾았다.

 주인의 입에서 3만 원이란 말이 나올려다 쑤욱 들어가더니 5만 원이라는 말끝을 흐린다. 뭔가 봉이 된 느낌 같은 것이 오지만 과객이니 도리없다. 계좌번호를 주라고 하고 전화기를 이용해 송금을 한다. 주인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리자 야무지게 쥐고 있던 방키를 내게 건넨다.

 “출장 오셨는 가벼요?”, “네. 근처에 밥 먹을 만한 곳 있나요?” 이렇게 묻자 몇군데를 가르쳐 준다. 24시간을 한다는 국밥집으로 가서 모듬국밥과 만두를 하나 시키고 진로소주 한 병을 따로 주문했다. 요즘말로 혼술이라 했던가. 쓰지 않은 소주를 마시며 내일 아침부터 움직일 곳을 정해본다. 고운사, 누룩바위,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예천의 말무덤 등으로 행선지를 정해 본다. 모두들 한번도 경험없는 곳이다.

 어느 덧 술병에 술이 떨어지고 어기적 거리며 숙소로 들어간다. 생각보다 깔끔한 방에서 감히 집에서는 상상도 못할 낚시채널을 켜 놓고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 갈 곳을 검색해 본다. 어떤 역사들을 지니고 있을지 사전 학습을 하고 현장에서는 확인하며 더 탐구하면 이상적이 답사가 되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색을 하다 보니 이른 아침 고운사에 가겠다는 것이 묘하게 오후로 쳐진다.

 경북 예천의 말무덤이 코스에 들어온 탓이다. 올 여름 이이화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읽던 친구가 고창의 전봉준 생가 마을에 말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러 고창까지 내려와 끝내 말무덤을 확인하고 간 것이 내게도 각인된 때문이다.

석탑리 적석탑.
석탑리 적석탑.

말(馬)의 무덤아닌 ‘言塚’ 거의 유일

 그때 예천의 말무덤을 검색했을 때 가장 또렷이 이 공간에 대한 정보를 매개해준 이는 광양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원규 시인이었다. 큰 마을이다 보니 마을내에서 설왕설래가 많았고, 혀끝에서 나오는 날선 말들이 일파만파였던 일이 자주 발생하니 나쁜 말일랑 저 무덤에 묻어 버리자며 가묘 같은 것을 만들고 말무덤(言塚)이라고 했다한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있는 말무덤은 지역을 상징하는 장수의 말(馬)무덤일진데, 이렇게 언총을 만들어 말씀을 공손히 하자는 지역은 예천이 유일하다 시피했는데, 4년전 우리 지역에도 언총이 하나 들어섰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이 있는 충효동 마을의 주민들이 예전에는 장군의 말 무덤이라고 했는데 이곳을 장군의 말 무덤에 더해 나쁜 말을 묻는 언총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전부터 그랬다고 하니 과거의 자료를 들춰 보았지만 모두 마총이었다. 하지만 민속은 살아있는 것이니 오늘 세대가 그렇게 말하면 그 또한 수용해주는 것이 도리라는 민속학 전문가의 입장을 수용하여 두개의 안내판이 들어선 것이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의 말무덤이다.

 나는 이렇게 세개의 언총을 기억하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고창의 것은 나중에 가더라도 의성과 예천이 가까우니 이번에는 꼭 들르자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아홉시가 다되어 숙소를 나온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의성문화원을 다녀오고자했다. 머릿속에 아른 거리는 의성의 자랑 금성산과 관련한 전설을 확인하고 푼 생각 때문이었다.

석탑리 적석탑 전경.
석탑리 적석탑 전경.

 군청 옆 문화원은 야속하게도 공사를 하고 있어서 문화원이 어디로 옮겨간지 알길 없었다. 아 이건 나를 허락하지 않은 징조야 라며 다음 코스로 곧장 향했다.

 안평면의 석탑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산청에서 만났던 전구형왕릉이라는 가야국의 왕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의 탑 형태와 유사한 네모진 모양의 석탑형태가 남아있다. 매우 희소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적석탑은 가령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등이나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있는 방등계단,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석탑이나 부도전 같은 형태를 띄우면서도 이게 다듬은 돌이 아닌 자연석과 같은 돌을 층위를 이루며 쌓은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질적이며 원형질의 석탑과 유사한 생각을 이끄는 힘이 있다.

 석가모니가 입적하고 난 후 다비를 하면서 만들어진 탑은 근본 8탑으로 시작하여 이후 아쇼카왕의 시대에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우며 더욱 확장하게 된 것이 시발이다.

 삼국시대에 넘어온 탑은 우리만의 고유한 양식과 체계를 이루며 발전해온 것인데 이런 석탑리의 탑과 같은 형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솔직히 내 자신도 구형왕릉이라고 전하는 그곳만 유일한 돌멩이를 쌓아 탑처럼 둔 적석이라고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역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에는 멈춤이 없어야 한다. 석탑리로 들어가는 길은 화물차 한대가 경우 들어가는 길이었지만 왜 저기에 절이 있어야 했는지 충분히 납득할만한 길이었다. 정면에서는 6층이고 측면에서는 5층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를 보면서 신묘한 돌문화의 한 현장을 보는 감격을 가졌다.

 마치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종교문화가 이런 탑을 조성한 후 더욱 디테일해지고 정교해지며 마침내 불심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려는 야욕까지 품게 했던 사실을 이해하는데 수긍이 가기도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토록 돌을 잘 다루던 삼국시대의 사람들이 왜 이런 돌무지를 탑의 형태로 쌓아 두고 탑리의 5층석탑처럼 오똑하고 정밀하게 바꾸지 않았는지 라는 의문도 함께 일었다.

 사방으로 감실을 두고 불상을 배치한 것도 이색적으로 보여졌으며, 2기는 비어있고 2기만 마모된 채 남아있는 것이 또 묘한 생각을 일게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런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까치밥 하나 남아있지 않은 사과밭을 지나쳐서 갈림길로 온다. 이곳은 또 누룩바위가 있는 곳이다.

쉿(말무덤 조형물).
쉿(말무덤 조형물).

 “쉿”하는 조형물이 떡 버티고…

 술과 식혜를 만드는 주재료인 누룩이니 예사롭지 않아 바위를 쳐다본다. 켜켜히 떡시루처럼 켜를 가진 돌이 층위를 이루고 있고 그 밑에 움푹 파인 곳이 있다.그 자체가 석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 붙여진 예사롭지 않은 이름 누룩바위는 막걸리가 솟아나는 바위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과객이 한잔씩 마시고 떠나게끔 했는데, 어느 욕심 많은 과객이 두잔을 먹고 나서 막걸리가 나오던 샘이 메꿔졌다고 전해온다. 마치 진도의 금골산 마애불 곁 구멍에서 쌀이 솟아나 이를 가지고 매일 수행을 하던 승들이 어느 날 매일 퍼내기 귀찮아 한번에 파낼려다 다시는 쌀이 솟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천천히 그 주위를 보며 이곳은 주막 하나가 들어서기 안성맞춤인 지리적 입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 다시 차의 시동을 걸로 이제 안동을 지나 예천으로 간다.

 의성과 안동과 예천이 접점 지역에 말무덤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쏟아 내는 말이나 글들이 어떤 형태를 띠고 타자에게 전파되며 다시 돌아오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무덤은 예천군의 대죽리에 자리했다.

 마을이 옅은 산자락을 끼고 낙동강을 바라보며 위치한 그곳은 한눈에 보아도 반촌이 분명해 보였다. 퇴계 이황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고,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의 생가가 있는 마을임을 밝히는 마을 안내도가 눈부시도록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마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낮은 야산에 마을 사람들은 말조심의 경구로는 부족함을 느껴 가묘를 만들고 말무덤이라고 명명하며 여기에 자신의 부끄러운 말들을 덜어내며 살아왔던 것이다.

누룩바위 전경..
누룩바위 전경..

 그 현명한 결정에 경의를 표하며 말과 관련한 다양한 경구가 있는 표석들을 둘러본다. 경전과 같은 혀조심 말조심의 언어들 사이로 입술에 검지를 대고 “쉿”하는 조형물이 떡 버티고 있다. 그래 이제 더 타자를 존중하고 쓸데없는 말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다음 행선지인 고운사를 향한다.

 (이어집니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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