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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어차피 다시 손을 대야 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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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7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영상으로 바뀐 날씨는 3월이라는 숫자와 함께 문득 다가왔습니다. 똑같은 날이 매일 반복되는 듯 보여도 새 계절은 확실히 다가옵니다. 남도의 바람은 부드러웠기에 짬을 내어 다녀온 빛고을의 풍광은 더욱 이국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도시에서 탐색의 중심은 옛 도청의 자리, 문화를 안고 있는 공간에서 시작했습니다. 장소의 의미에 대해 열심히 고민한 건축가가 만든 공간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새롭고도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전과 다른 것은 그 공간이 주변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식당과 서점, 소품을 파는 곳과 전시를 볼 수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마치 취향의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전염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감도와 디테일을 안고 있는 공간들이 불과 수년 전 방문 이후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가 심은 씨앗이 도시에 발아하며 주변의 생태계를 바꾼 것입니다.

봄철 맞아 오랜만에 찾은 남도
창의 넘치는 새 공간에 감화돼
한때 인기 끈 시장은 활력 잃어
치열한 고민 없으면 오래 못가

빅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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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 중심에 공감하는 수용자가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간의 품격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상점의 간판 속 서체 하나에도 반응하기에 이들과 공명하고파 하는 이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동류와 호흡하고 싶기 때문이라도 그 장소를 선택하였고 신호를 보내기 위해 공간을 창조합니다. 상대의 취향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을 만큼의 창의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이러스는 민들레 씨앗처럼 도시의 다른 곳으로 퍼져나갑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한 얕은 구릉의 산책로에 자리 잡은 찻집은 심지어 간판 하나 없이 색상과 형태만으로 알려져 사랑받을 만큼 오래된 도시의 진화는 놀라웠습니다.

업무 중 짬을 내어 돌아보며 얻은 새로운 영감을 마음에 담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을 향하다 지역의 특색을 담은 리뉴얼로 알려져 명소가 되었던 시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번 활기찬 경험이 그리워 다시 찾아보니 예전과 다르게 휑덩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체에서 널리 소개되고 많은 방문자로 북적거리던 곳에 문을 닫은 상점까지 보일 정도로 활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음을 확인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이러스로 줄어든 관광객과 어려워진 경기 탓도 있겠지만 그사이 감도가 섬세해진 이들이 도시 내 더욱 고민을 많이 한 공간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도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오래된 시장에 트렌디 함을 부가하는 노력은 흥미를 끌 수 있었지만 깊은 고민으로 치열하게 만들어낸 공간과 경쟁하기 위해서 더욱 진지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저는 5년 혹은 그 이후를 내다보고 많은 사람이 함께할 공간을 만드는 것을 전문가들과 함께 궁리하는 프로젝트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고민을 시작할 때마다 늘 주어진 여유는 빠듯하고 쓸 수 있는 시간은 밭다는 것입니다. 욕망은 크고 자원은 유한하기에 물리적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제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약속된 일정은 여러 사정으로 바꿀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일만 눈앞에 커다랗게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바꾸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기존 공간의 제약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럴 때마다 주어진 환경의 한계에 타협하고 적당히 답을 내어야 한다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번 방문은 이러한 유혹에 결코 굴복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열심히 만들었다 해도 그 가치와 의미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핑계로 임시변통하여 미봉한다면 어차피 다시 손을 대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만들 때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함도 당연합니다. 짧은 남도의 방문에서 다시 확인한 명백한 진리는 저의 프로젝트에 머무르지 않고 각자가 하는 일과 저마다의 인생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국의 유명한 디저트가 입소문을 타고 난 후 점포가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다 곧 아무도 찾지 않는 허무한 유행의 반복처럼 나의 인생이 소모되고 잊히면 결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에 대한 준비를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아름다운 도시의 변화에 감사합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