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회장 회고록이다. 고인이 생전에 썼던 자서전을 차남인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정리해 엮었다. 2020년에 타계한 고인은 무일푼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롯데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기업은 국민에게 짐이 되어선 안되며, 항상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임직원들에게 역설했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에 고생하며 기업을 세운 창업가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 뭉클함을 남긴다.
* ‘11남매 맏이’ 신격호 - 신격호 회장의 고향은 둔터마을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623번지다. 생가는 수몰되어 오래 전 인근에 옮겨 지은 상태다. 신 회장은 1921년 11월 3일에 신진수와 김순필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산(靈山) 신(辛)씨 초당공파 27대 손이다. 할아버지 신석곤은 그의 이름 가운데 자로 ‘격(格)’자를 골랐다. <맹자>에 나오는 ‘격군심지비(格君心之非)’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니, 손자가 세상에 나가 큰 일이 되길 기대했던 모양이다.
* 의식이 남달랐던 큰 아버지 - 망국의 한을 절감한 큰아버지는 나라의 힘을 키우려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3.1 운동 직후에 사재를 털어 마을 어귀에 사립학교인 ‘둔기의숙(芚基義塾)’을 세웠다. 신 회장도 이곳을 오가며 천자문을 공부했다. 학교 살림은 양잠과 양봉 수익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했던 큰아버지는 신문이 오는 날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아 읽어주곤 했다. 신 회장은 “큰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나중에 경영자의 삶을 살게 되는 내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 소설가를 꿈꾸다 - 산 고개와 시냇물을 서너 개 씩 건너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가던 신 회장은 사촌형이 가지고 있던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를 우연히 접하고 처음으로 막연하게나마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가를 장래 희망으로 꿈꾸게 된 그는 큰아버지가 읽던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비롯해 염상섭 김유정 등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큰아버지는 “농사만 짓기 아까운 녀석”이라며 신 회장을 울산농업실수학교에 진학시켜 준다.
* ‘경성’을 경험하며 큰 세상을 상상하다 - 울산농업실수학교 졸업 후 사촌 형의 추천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 설립된 봉양장에서 목양지도기술원으로 일하게 된 신 회장은 경성에 처음 와 갖가지 신문물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6층짜리 화신백화점 건물이었다. 반도호텔은 더한 위압감을 주었다. 경성을 구경하면서 그는 그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는 일본 도쿄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된다.
* 공중목욕탕 계획 무산과 일본행 꿈 - 창씨 개명을 신 회장 일가도 피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시게미츠(重光)라는 성을 쓰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는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 대성통곡 했고, 결국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1년 사이에 타계했다. 온 마을에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그 때, 신 회장은 큰아버지 유지를 받들고 마을 분위기도 바꿔보겠다며 공중목욕탕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보수적인 마을 촌로들의 반대로 뜻은 좌절되었고, 그는 꽉 막힌 마을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아버지가 반대하자 그는 집에도 알리지 않고 시모노세키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 신격호는 ‘부동산 투자 귀재’? - 1970년에 둔기 마을이 수몰지역이 되면서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그 중에 부근 야산에 쓸모 없는 땅을 가진 이들이 간청해 시세보다 후하게 쳐서 매입했다. 그런데 이 땅이 나중에 비업무용 부동산 규제에 묶여 매각을 종용받게 된다. 일본에서도 거래 대리점들이 부도나는 바람에 담보로 잡았던 부동산을 떠안았던 것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한때 ‘부동산 투자의 귀재’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는 “나는 평생 투기를 목적으로 땅이나 건물을 산 경우가 단 한 건도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이나 마트, 공장 등 사업장을 위한 업무용 부동산으로 사들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 우유배달원에서 소사장으로 - 도쿄에서 언양보통학교 동창에게 몸을 의탁한 신 회장은 손수레로 우유 배달을 하게 된다. 결근도 지각도 없이 성실하게 근무하던 그를 높이 본 대리점 사장이 배달 구역 두 곳을 독자적으로 운영해 보라는 제안했고, 결국 도쿄행 넉 달 만에 그는 처음으로 기업인이 된다. 대리점 사장은 나중에 롯데제과 우라와 공장의 고문으로 영입해 보은 했다. 여기서도 신격호 특유의 기업인 DNA가 발휘된다. 우유 외에 양유까지 취급해 어르신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고 신문까지 함께 배달하며 큰 힘 들이지 않고 수입을 크게 늘렸다. 신문을 통해 일본 사정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덤이었다.
* 문학의 꿈을 접고 화학도로 변신 - 와세다실업학교 야간부에 편입한 그는 근처 와세다대학의 중고서점을 자주 들렀다. 그곳에서 여주 출신의 유주현을 소개받았고 황용주 이병주 등과도 만나게 된다. 그는 특히 <관부연락선>, <지리산> 등의 대작을 남기게 되는 이병주를 보며, 작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지를 절감하게 된다. 결국 신 회장은 고민 끝에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사업에 도움이 되는 부기와 주산, 제도 등을 배우는 데 더 공을 들이게 된다. 이어 와세다고등학교 응용화학과에 진학해 운명적인 ‘화학’과 조우하게 된다.
* 첫 투자자이자 평생의 은인 ‘하나미츠’ - 신 회장은 전당포와 고물상을 경영하던 하나미츠라는 어르신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가게 회계장부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던 인연으로 신격호를 눈 여겨 보았던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6만 엔을 커팅 오일 제조업에 투자키로 했다며 신격호에게 그 일을 맡긴다. 하지만 하네다 공항 근처에 세운 그의 공장은 연합군의 도쿄 대공습 때 초토화 된다. 남은 투자금의 절반으로 새 공장을 마련했으나 또다시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다. 무일푼이 되어 고개를 숙인 신격호에게 하나미츠 씨는 신격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오히려 다독여 주었다. 종전 후 ‘롯데’ 이름으로 재기에 성공한 신 회장은 평생의 은인인 그에게 나중에 6만 엔의 원금에 더해 도쿄에 작은 집까지 선물로 드렸다.
* ‘롯데’ 브랜드로 화장품 사업에 성공하다 - 신 회장은 해방 후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비누’를 택했다. 유지나 글리세린 등 비누 원료가 군수용으로 많이 있었다. 기존 제품에 크림과 포마드를 추가해 차별화함으로써 여성 피부미용 영역까지 수요층을 넓혔다. 사실상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브랜드 이름도 꿈 속에 나타났던 ‘샤롯데’에서 착안해 ‘롯데’로 정했다. 이후 롯데 상표를 붙인 화장품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화장품 사업이 정체 기미를 보이자 나중에 롯데 사업의 마중물 역할을 할 ‘껌 사업’에 뛰어들어 철저한 위생관리로 큰 성공을 일군다. 그리고 1948년 6월 28일에 ‘주식회사 롯데’를 창립한다.
* 평정심을 유지하라 ‘거화취실(去華就實)’ - 1961년을 기점으로 롯데는 일본에서 껌 업계의 정상에 올라선다. 회사가 급성장하자 신격호는 고무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초심을 다지기 위해 사무실 벽면에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고 쓴 큰 액자를 내건다. <장자>에 나오는 ‘조탁복박 거화취실(彫琢復朴 去華就實)’에서 따온 것으로, ‘한 껏 모양을 내 치장했던 것을 다시 소박한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겉치레를 배제하고 실속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는 수시로 액자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했다.
*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 -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신 회장은 고향의 아버지를 일본으로 모신다. 16년 만의 상봉에서 그는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겠다. 한국에도 회사를 차리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1958년 5월 26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주식회사 롯데를 세우고 동생 신철호에게 경영 책임을 맡김으로써 이뤄진다. 신격호는 박정희 정부가 재일동포 기업인들을 1962년 4월에 한국으로 초청했을 때 21년 만에 비로소 고국 땅을 밟는다. 이 때 투자 권유를 받고 조국에서 할 사업을 구상하게 된다.
* 쥐 털 나온 초콜릿을 모두 불태우다 - 껌에서 초콜릿으로 성공적인 사업 확장을 이뤄 승승장구하던 1965년 무렵. 공장에서 간밤에 초콜릿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현미경으로 찾았을 만큼 작은 물체인데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창고에 쌓아둔 카카오 콩 부대에 쥐 한 마리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추측만 있을 뿐이다. 신 회장은 즉시 10톤 짜리 탱크 3개에 가득했던 2억엔 상당의 초콜릿 원료를 모두 불에 태우라고 지시한다. 최근 며칠 사이에 만든 제품과 원료까지 모두 태우도록 했다. 그는 “그 충격의 크기 만큼 위생관리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계기로 삼는다면 이만한 손실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 박정희 의장과의 첫 만남 - 1962년 4월 20일. 신격호는 울주 산골짜기에서 함께 자랐던 동생 이후락 당시 청와대 공보실장의 주선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난다. 그 때 “모국에 투자해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특히 기간 산업이 취약하다는 진단도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류찬우 회장은 한국 정부 제안에 신동(伸銅) 분야에 투자해 풍산금속을 세우는 등 재일동포 기업인들의 한국 투자가 본격화되었다. 1964년 경제부총리로 발탁된 장기영은 신격호에게 방위산업 투자를 권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화목과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기업가치에 반하는 것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 대신 신격호는 제철이나 제강을 눈 여겨 보게 된다.
* ‘제철왕’ 박태준과의 악연 - 이후락은 얼마 후 신격호에게 제철사업을 제안한다. 김학렬 경제수석은 직접 메모지에 도쿄대학 산업기술연구소에 교수로 근무하던 김철우라는 이름을 적어 건네 주었다. 나중에 포철 회장이 되는 박태준도 그 즈음에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함께 제철사업 프로젝트를 함께 점검했으나 어느 순간 그로부터 “제철사업은 워낙 규모가 크고 공공성이 강해 정부 주도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롯데는 빠지라는 통보였다. 난처하고 섭섭했지만 8개월 동안 조사 연구한 보고서를 아무 조건 없이 통째로 넘겨주었다. 모국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기록에 남겨진 한국의 제철산업사에 당시 롯데의 기여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몹시 서운했다고 회고했다.
* 염원했던 석유화학사업을 시작하다 - 제과와 식품사업이 한국에서 ‘서자’ 취급받자 신격호는 정부가 여천석유화학단지의 호남에틸렌과 호남석유화학 민영화 입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지배주주인 한국종합화학의 육군대장 출신 백선엽 사장이 신격호를 귀화한 일본인이라며 입찰서류를 반려해 버린다. 어렵게 자신이 귀화 일본인이 아님을 증명한 끝에야 입찰 자격을 얻었고, 그는 두 기업 모두 손에 넣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청와대가 제동을 걸었다. 오원철 당시 경제수석이 두 곳 중 하나만 인수하라고 압박해 온 것이다. 결국 그는 에틸렌을 만드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기로 최종 결정한다. 인수한 그 해 말에 2차 오일쇼크가 터지는 등 한 동안 큰 어려움을 겪다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경력을 쌓은 차남 신동빈을 투입하게 된다. 신동빈은 1990년부터 5년 동안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
* 세계적인 관광호텔을 꿈꾸다 - 1970년 11월에 신격호는 청와대의 부름을 받는다. 박정희는 그에게 적자 때문에 골칫거리였던 반도호텔을 맡아달라며, 인근 국립도서관까지 불하해 줄 테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관광호텔을 지어 달라고 당부했다. 호텔업 자체가 생경했지만 당시 롯데의 규모로는 사운을 걸어야 할 만큼 큰 사업이었다. 사업전망도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왕 지을 거면 세계 정상급으로 지어보자고 결심한다. 그는 호텔에 백화점, 오피스까지 복합개발하겠다며, 객실 수 1000실에 높이 40층짜리 ‘비원 프로젝트’를 내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최종안은 지상 37층, 지하 3층에 객실 수 976실이었다. 안전 우선의 원칙으로 철골구조 공법으로 짓는 바람에 건설비도 늘었다. 건설이 끝난 후 총 투자액을 정산해보니 1억 4500만 달러가 들었다. 처음 구상했던 금액의 3배로, 경주고속도로 건설비용과 비슷한 규모였다.
* 청와대 경호실의 뒷다리잡기 - 롯데호텔 건설 프로젝트가 한창이던 때, 청와대 경호실에서 갑자기 호출이 왔다. “누구 맘대로 38층을 짓는 것이냐”며 18층으로 낮추라며 억지를 부렸다.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니 경호상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해 시키려 해도 불통이었다. 이 얘기를 JP(김종필)가 어디에서 들었는지 대통령에게 얘기해 해결해 주었다.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가 감사를 표하자 박정희는 “조국에 투자하는 신 회장께 제가 더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라고 화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을 개관한 후에도 경호실은 청와대 방향으로 난 고층객실의 창문을 가림막으로 덮어 바깥을 볼 수 없게 하라고 생떼를 썼다. 마침 호텔을 방문했던 JP가 어이없어 하며 다시 박정희에게 건의해 없던 일로 했다고 한다.
* 탄탄한 재무구조 덕에 유통산업을 확장하다 - 신 회장은 롯데호텔 신축부지를 사들여 부속건물 일부를 백화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호텔롯데는 외국(일본) 기업이라, 백화점 사업에 투자할 수 없었다. 국내 회사라도 서울 4대문 안에선 백화점을 신설할 수도 없었다. 결국 신격호는 별도의 국내법인을 설립하고, 백화점 대신에 쇼핑센터라는 이름을 앞세워 문제를 해결했다. 외환위기 시기에 도산 위기의 부실 기업과 점포들을 속속 인수해 덩치를 키워 업태 다각화에도 성공했다. 평소에 탄탄한 재무구조를 추구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셔틀 경영’ 아닌 ‘시차 경영’ - 신격호는 1967년 롯데제과를 한국에 설립한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홀수 달엔 한국에, 짝수 달엔 일본에 머물렀다. 이를 두고 ‘셔틀 경영’이란 표현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시차 경영’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당시엔 한국과 일본의 기술과 경영기법이 15~20년 정도 차이 났기 때문이었다. 신격호가 한국에 와 호텔 34층에 머물 때마다 공짜 투숙 논란이 일었다. 그는 한국 출장 때 늘 월 1000만 원 정도의 출장비를 청구해 받아와 숙박비를 지불하고 꼬박꼬박 영수증도 챙겨 제출했다. 100만 원 정도는 남겨 임직원들에게 격려금 등으로 지급했다. 이는 따로 영수증 처리를 안 했는데 나중에 보니 총액이 2000여 만원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를 일본 국세청이 비자금 아니냐고 문제 삼기도 했다.
* 불모지 잠실에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를 세우다 - 1980년대 초반부터 신격호는 ‘롯데월드’라는 이름을 붙여 관광과 쇼핑 문화 스포츠가 어우러진 ‘도시 속 도시’를 구상하게 된다. 그 부지로 생각한 곳이 서울 강남 잠실의 석촌호수 인근이었다. 당시만 해도 석촌호수는 볼품 없는 물 웅덩이로, 폭우가 쏟아져 한강이 범람하면 물이 차는 유수지였다. 때문에 부근 일부 토지들도 몇 몇 기업이 매입했다가 자금난에 다시 매물로 내놓곤 했다.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잠실 개발이 이뤄졌으나 이 땅을 매입했던 율산그룹과 한양쇼핑이 잇달아 부실화되는 바람에 정부가 롯데에 그 땅을 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 불모의 땅에 롯데월드가 완성되고 주변이 노른자위 땅으로 바뀌자, 일각에서 특혜설이 제기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 도널드 트럼프와의 ‘밀당’ - 신 회장은 잠실프로젝트팀을 구성한 후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의 실내 복합시설 ‘웨스트 에드먼턴 몰’을 벤치마킹해 당시로선 누구도 상상 못한 ‘실내 테마파크’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내진 설계와 돔 유리 천장 등 난제가 많았으나 결국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호텔과 테마파크를 완공하며 꿈을 이룬다. 롯데월드 성공을 계기로 그는 세계 주요 도시로 이를 확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미국 후보지로 꼽힌 곳이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강변이었다. 직접 미국으로 가 소유주와 매입 협상을 벌였지만 몇 차례 밀당 끝에 딜은 무산됐다. 그 땅 주인이 도널드 트럼프였다.
* “서울에 문화유산에 남을 랜드마크를 세우자” - 신 회장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파리의 에펠탑처럼 서울에도 국보급 랜드마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국보급 문화재 컬렉션을 부러워했지만, 자신은 그런 안목이 부족하니 미래에 남길 문화재, 특히 현대판 국보급 조형물을 창조하자는 생각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 숙원사업으로 롯데월드타워를 추진해 1987년 12월 부지 8.7만 ㎡를 매입을 시작하게 된다. 북한이 유경호텔을 105층으로 짓는다는 계획에 자극받아 123층 복합단지로 건설키로 마음 먹는다. 정부가 비업무용 부동산이라며 강제 매각을 종용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살 사람이 없어 부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2011년 6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5년 상량식을 거쳐 2017년 2월 준공에 이른다. ‘세계 최고층’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478m 높이에 설치된 ‘스카이데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유리바닥 전망대로 인정 받았다.
* 재일동포들이 후원한 올림픽과 월드컵 - 한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참가하게 되었지만 재정 상황이 워낙 열악했다. 선수단 교통비와 숙박비 정도만 간신히 마련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비싼 비행기는 못 타고 거의 한 달이 걸리는 배편을 이용해야 했다. 재일동포들이 이때 팔을 걷어 부쳐 65만엔 가량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고, 이 돈으로 ‘KOREA’라는 이름이 새겨진 단복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도 재일동포들이 도움을 주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의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예선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 역도산을 비롯해 독지가들과 함께 성금을 전달했다.
* 유창순 한국은행 외환과장과의 인연 -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큰 반사이익을 얻는다. 당시 신 회장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에서 유창순 외환과장을 만나게 되고, 이듬해 그가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하면서 오랜 인연을 갖게 된다. 사업이 번창할 때 신격호는 전후 복구를 위해 한은 도쿄지점에 6000만 엔을 예치하는 성의도 보였다. 당시 유창순은 신격호에게 “언젠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는 그날이 오면 꼭 한국에도 기업을 세워 달라”고 부탁했고 신격호도 “그러겠다”고 약조했다. 유창순은 1967년 4월 3일 한국에 롯데제과가 설립되었을 때 대표이사 회장으로 영입된다.
* ‘바둑 천재’ 조치훈을 후원하다 - 바둑 애호가였던 신 회장은 1962년 8월에 한 신문에서 만 6세의 조치훈이라는 바둑 천재가 ‘일본 바둑계의 구도자’라 불리던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문하생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 때부터 그는 조치훈과 그의 형 조상연에게 매달 2만 엔의 후원금을 전달했다. 당시 롯데의 중간 간부 월급 만큼의 큰 돈이었다. 조치훈은 11세 9개월의 나이에 최연소 입단한 후 1968년 프로기사로 데뷔했고 기대 대로 1983년에 ‘대삼관(大三冠)’이라 불리는 기성전과 명인전, 본인방전 등 3개 기전을 모두 석권하는 등 불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 이병철 회장과의 동병상련 - 삼성그룹도 박정희 정부로부터 특급호텔을 지으라는 강권을 받아 서울 장충동 언덕의 영빈관을 떠안아 신라호텔을 짓고 있었다. 이 회장은 롯데호텔 건설현장을 자주 들렀는데. 그때마다 호텔 맞은 편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칸티나’에서 함께 점심으로 봉골레 파스타와 안심 스테이크를 즐겼다. 당시 롯데는 제일제당에서 엄청난 양의 설탕과 밀가루를 구매하던 ‘빅 바이어’였다. 그런데 언젠가 롯데가 제당 공장을 차린다는 루머가 돌았고, 이 회장이 정색을 하고 찾아와 진위를 물었다고 한다. 신 회장이 짐짓 아무 얘기도 않자, 이 회장은 “제당에서 좋은 조건으로 계속 원료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양평동 제일제당 미풍 공장도 넘기겠다”고 했다. 잘못된 소문 덕분에 알토란 같은 공장부지 하나를 장만한 것이다.
* 스포츠 스타들과의 인연 - 신 회장은 역도산(본명 김신락)과 자주 만나 맥주를 나누는 사이였다. 역도산의 애제자 김일 선수에게는 수련생 시절부터 자주 불고기를 대접했다고 한다. 신격호는 복싱을 즐겨 보았다. 특히 홍수환 선수의 팬이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사모라에게 져 낙담해 있을 때 후원한 덕에 홍수환은 다시 주니어 페더급에 도전해 4전 5기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짱구’ 장정구 선수도 많이 아꼈다. 도쿄 고라쿠엔에서 벌어진 15차 방어전에서 도전자를 7번이나 다운시키고 8회 TKO로 타이틀을 지켰을 때 그를 따로 초청해 격려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