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만화를 넘어선 그래픽 노블이 궁금하다면?

반짝이는 시선을 장착한 그래픽 노블계의 새 얼굴들과 소장가치 200%인 다섯 권의 그래픽 노블까지, 2022년 더욱더 황홀해진 그래픽 노블의 세계.

프로필 by ELLE 2022.01.30
 
얼마 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개봉했다. 과거 시리즈와 반가운 접점을 만들며 자신만의 멀티버스 세계를 구축한 영화는 곧바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고, 국내 중고시장의 마블 코믹스 거래량도 상승했다. 마블에서 1962년에 출판한 <스파이더맨> 원작 <어메이징 판타지 15호>는 미국 헤리티지 경매에서 약 42억 원에 낙찰되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만화책 기록을 갈아치웠다. 시리즈가 성공하면 ‘탄탄한 원작’의 가치도 오른다. 미국 만화 산업을 이끄는 양대 산맥인 마블과 DC 코믹스는 둘 다 1930년대에 설립된 후 지금까지 이 위대한 유산을 발판으로 영화와 게임,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영역을 뻗쳤다. 이 모든 일이 한 뼘 크기의 만화책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엄청난 산업 규모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1964년 미국의 유명 만화비평가 리처드 카일에 의해 탄생했다.
 
얇은 용지에 연재되던 싸구려 간행물이 아닌, 스토리 구조가 길고 복잡하며, 완성도 높은 그림을 포함한 단행본 만화에 새 이름을 헌정한 것. 이후 주제와 구성에서 절대 소설에 뒤지지 않는 수준급의 만화가 쏟아져 나왔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삶을 비춘 <쥐Ⅰ>(1986)와 <쥐Ⅱ>(1991), 부자 관계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불안을 탐구한 <지미 코리건>(1995), 이란혁명 속에서 자유와 유머, 존엄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다룬 <페르세폴리스> (2000)까지. 소재도 다양해졌다. 동시에 그래픽 노블의 인디문화적 성격도 굳건해졌다. 작가들은 언제나 상업성보다 자기고백에 충실했으며, 수백 수천 개의 컷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메시지에 집중하는 끈기와 이후 이어지는 정교한 작업들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원될 뿐이었으니까. 슈퍼맨과 배트맨,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 각자의 삶에서 나름 ‘괴물’이었던 슈퍼히어로들처럼 그래픽 노블은 꾸준히 ‘다름(Otherness)’과 소수자를 위한 장르로 남았다.
 
성소수자와 유색 인종, 세상의 수많은 이방인을 초대해 온 그래픽 노블은 여성 또한 끌어안는다. <엘르> 캐나다에서도 과거 이 점에 한 차례 주목한 바 있다.  “만화 업계는 오랜 시간 남성 작가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던 세상이었어요. 변화를 싫어하는 이들과 달리 여성 창작자들은 훨씬 신선한 시각으로 그래픽 노블 세계를 한결 풍성하게 만들었죠.” 1989년에 설립된 후 꾸준히 소속 작가의 성비를 비슷하게 유지하며 균형 잡힌 목소리를 내는 일에 몰두해 온 캐나다 출판사 드론 앤드 쿼털리의 편집장 트레이시 허렌의 증언이다.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여성 작가의 그래픽 노블 중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캐나다 작가 아민더 달리왈의 <우먼월드>. 그간 연재한 웹툰을 정리해 출간한 이 그래픽 노블에서 그는 연대를 통해 생존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독특한 여자들만의 세계를 창조했다. 드론 앤드 쿼털리가 올해 중 출판할 두 권의 그래픽 노블 역시 모두 여성 작가의 작품. 중년의 나이에 비로소 만화가의 길에 들어선 캐나다 작가 에밀리 캐링턴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한 자전적 이야기와 한 여성이 남은 생을 다른 여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말년에 남편을 떠난다는 스웨덴 아티스트 아넬리 푸르마르크의 이야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풀>로 미국 하비상을 비롯해 여러 국제상을 수상한 김금숙 작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신작 <이방인>을 통해 외국인의 시선을 밀도 있게 그렸다.

 
다시 트레이시 허렌의 말. “그래픽 노블 작가들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도구를 두 개나 장착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글과 그림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사소한 이야기까지 좀 더 쉽게 할 수 있죠.” 그래픽 노블은 오래전 문학에 새 숨결을 불어넣거나 미술과 영상, 게임 같은 다른 영역을 능숙하게 포섭할 수 있는 꽤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2005년부터 그래픽 노블을 포함해 여러 예술 전문 도서를 출판해 온 미메시스는 2014년부터 ‘아티스트 시리즈’를 통해 피카소, 프리다 칼로, 쿠사마 야요이 등 총 일곱 명의 예술가를 조명해 왔는데, 그래픽 노블이 이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치라는 굳건한 믿음에서다. <앵무새 죽이기>나 <돈키호테>처럼 과거 명작이 그래픽 노블로 변신해 다시 사랑받은 예도 많다. 그래픽 노블은 그러니까 새로운 렌즈 같은 것이다.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을 확대해 보여주거나 익숙한 광경을 생생한 자극으로 새롭게 각인시켜 주는. 그리고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 우리의 시야는 전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NEW FACES

란탄과 박주현. 동시대 20~30대 여성의 시선을 무기로 그래픽 노블 세계에 뛰어든 두 신진 작가가 쏘아 올린 빛.

찰나의 감정에 집중하는 힘 <화의 방향> 란탄 작가

여성을 위한 미디어 플랫폼 ‘핀치’에서 연재됐던 <화의 방향>의 단행본화를 결심한 계기
원래부터 책으로 낼 생각으로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었다. 웹툰이 각광받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책에 대한 로망이 있다.
원고와 원화를 편집하며 가장 까다롭게 느낀 지점은
<화의 방향>이 원래 스크롤 만화였다는 걸 독자가 알아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면 밧줄 이미지도 덩달아 늘어지는 효과처럼 책으로 옮기기 어려운 웹툰만의 장치가 많아 결국 모든 원고를 책의 형식에 맞춰 새로 작업했다.
대한민국 여성의 화의 근원을 추적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이제 여자가 다 됐네’ ‘원래 남자애들은 짓궂어’ 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차별적 언행과 상황은 나와 주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너무 사소한 일로 치부될까 봐 말하지 못했을 뿐. 꾸준히 축적해 온 감정을 만화를 통해 해소하고 싶었다.
가장 공들여 작업한 장면
(스포 주의!) 할머니의 장례식 에피소드. 세 모녀가 서로의 감정을 터놓았음에도 결국 멀어지고 마는 관계의 정점을 그렸다. 책에는 실타래처럼 얽힌 관계를 의미하는 여러 장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밧줄·천·도형 등 모든 요소가 뒤엉켜 있다.
대개 흑백으로 작업하는 당신이 색을 활용하는 방식은
독자의 집중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색을 쓰더라도 최대한 절제하는 편. 세 남매에게 각각 노랑, 파랑, 초록이란 고유색을 부여해 서로 다른 에피소드와 컷이 어떤 인물에 해당하는 내용인지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끔 했다.
그래픽 노블의 매력
웹툰에서는 컷과 대사, 말풍선 등의 요소를 배치할 때 가독성 위주로 생각하면 되는데 그래픽 노블은 아니다. 기존 규칙을 깨고 글과 그림을 조합하면서 여러 가지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즐겁다.
<화의 방향> 이후 집중하고 있는 이야기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20~30대 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현대인과 돌봄 노동에 대한 화두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강추’하는 그래픽 노블
송아람 작가의 <두 여자 이야기>. 외모부터 성격, 연애 스타일, 성장 환경까지 모두 다른 두 여자가 각자의 삶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돼주는데, 거기서 느껴지는 뭉클함이 있다.
 

소외된 존재를 향한 뭉근한 관심 <빛 뒤에 선 아이> 박주현 작가

2018년 출간한 첫 그림책 <그레그와 병아리> 이후 그래픽 노블로 돌아온 이유
고등학교 때 우연히 알비노란 존재를 길에서 보고 관심이 싹텄다. 조사를 시작하면서 좀 더 밀도 높은 전개 방식이 필요하겠다 싶더라. 그러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전하게 됐다.
이전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던 부분이 있다면
독자들이 주인공 유진의 심리에 충분히 공감하도록 대사와 장면 배치에 신경 썼다. 인물 간의 소소한 대화 등 디테일을 다듬는 과정에도 꽤 많은 시간을 들였다.
따뜻한 서사와 수채화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의 조화가 아름답다. 글과 그림 중 더 공들인 부분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을 짠 후에는 그림에 조금 더 욕심을 내며 작업했다. 수채화 물감과 건식 미술 재료를 사용해 총 220점 정도의 원화를 그렸다. 물감과 색연필을 함께 사용했을 때 나오는 살짝 탁하면서도 포근한 색감이 다소 어두우면서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장 공들여 작업한 장면
주인공 유진이 동물원에서 핑크 돌고래와 마주하는 장면. 예쁜 색감에도 신경 썼지만 서사적으로도 중요한 장면이었다. 유진이 핑크 돌고래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며 어떤 결심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핑크 돌고래와 유진이 처음 눈을 맞춘 후 페이지 컷 수가 점점 줄어들며 익스트림 클로즈업 컷으로 장면이 마무리되는데, 책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라 공을 많이 들였다.
검은 고양이, 핑크 돌고래 등 남다른 외모로 쉽게 편견의 대상이 돼온 존재들이 등장한다
평소 뉴스를 꾸준히 챙겨 보는데,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는 일에 유독 마음이 간다. 비슷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텐데, 내 책이 사회적 편견을 허무는 데 기여했으면.
그래픽 노블의 매력
내게 그래픽 노블은 만화이자, 소설이자, 영화처럼 느껴진다. 특히 읽을 때마다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매력적이다.
<빛 뒤에 선 아이> 이후 집중하고 있는 이야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에서 혐오 대상이 돼버린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하지만 ‘변화와 극복’이라는 키워드는 놓지 않을 생각이다. 힘든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결국 희망을 비추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강추’하는 그래픽 노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클로에 크뤼쇼데의 <여장 남자와 살인자>. 평소 어둡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매력적이고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에 마음이 간다.
 

 
 

GET GRAPHIC!

더 생생하고 실감 나게. 소름 돋는 묘사와 증언으로 꽉 찬 다섯 권의 그래픽 노블. 

<재윤의 삶> by 정재윤 여성으로서 느낀 일상 속 화두를 재치 있게 건네온 정재윤 작가의 첫 그래픽 노블. 학창시절에 체감한 남녀의 본능 차이와 브래지어, 성형,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발칙한 단상까지, ‘재윤의 삶’이란 주제로 2016년부터 업로드해 온 만화를 단행본으로 엮어냈다. 엄청난 서사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앞으로도 여자들의 이야기를 여자의 시선에서 지속할 계획. 미메시스.

 
<쿠사마 야요이> by 엘리사 마첼라리 미메시스 ‘아티스트 시리즈’의 일곱 번째 주인공. 강박적인 물방울무늬로 자유와 사랑, 평화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를 위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노블 작가 엘리사 마첼라리가 직접 펜을 들었다. 여섯 가지 색으로 간결하게 진행되는 컬러 플레이. 그 속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무늬로 가득한 페이지가 시선을 붙잡는다. 미메시스.  
 
<우먼월드: 여자만 남은 세상> by 아민더 달리왈 20~30대 여성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어느덧 23만 명의 팔로어( aminder_d)를 보유한 캐나다 출신의 그래픽 노블 작가 아민더 달리왈. ‘유전 이상으로 남자가 멸종해 버린 세계’를 상상하며 2017년부터 연재한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연대하는 여자들의 ‘웃픈’ 서사에 응답한 디즈니가 현재 작품화를 계획 중. 롤러코스터. 
 
<셀린 & 엘라: 문득 네 생각이 났어> by 미바·조쉬 프리기 아름다운 작화로 ‘소장각’을 불렀던 <셀린 & 엘라: 디어 마이 그래비티>를 잇는 두 번째 이야기. 포근한 겨울 풍경과 한층 깊어진 셀린과 엘라의 이야기는 독립출판사 우드파크픽처북스를 이끌며 국내에 다양한 그래픽 노블을 소개해 온 미바·조쉬 프리기가 3년에 걸쳐 완성한 결과물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범성애 화두가 의외의 생각거리를 안겨줄 것. 우드파크픽처북스.  
 
<돼지> by 오사 게렌발 스웨덴에서 지금 가장 뜨거운 여성 만화작가. 데이트 폭력, 가족 간의 소통 불능 등 관계와 사회 속 불안 요소를 들추는 오사 게렌발의 최근작.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가스라이팅을 향했다. 오만하고 폭력적인 남자에게 휘둘린 여자들이 서로 마주하며 겪는 당혹감과 스산한 연대감을 비춘 그래픽 노블.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해방이라는 듯 말풍선을 가득 채운 대사들이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우리나비.

Credit

  • 에디터 류가영
  • 사진 DRAWN&QUARTERLY/우창원
  • 디자인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