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남는 건, 어디에 사는가보다 ‘무엇을 하는가’다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지난주 새로운 인턴들이 누사프니다에 도착했다. 다이빙숍 리플렉스와 환경단체 인도 오션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하는 해양환경 코스 참가자들로, 각자 8주에서 16주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인턴십은 작년부터 준비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의 방역 조치가 수시로 변경됨에 따라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인턴들은 다이빙 전문가 과정과 산호 양식장 조성을 병행하게 된다. 최종 참가자는 일곱 명이지만 비자 문제로 늦게 합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네 명이 먼저 도착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단기 관광객을 제외하면 참으로 오랜만에 동네에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난 것이다.

누사프니다의 유명한 산호 해변 크리스탈베이

누사프니다의 유명한 산호 해변 크리스탈베이

인턴들이 호기심에 눈을 빛내면서 조르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이빙센터 관계자들은 웃으며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예년에는 일 년 중 가장 비수기인 2월에 섬 전체의 외국인 인력이 대거 바뀌었다. 새로운 일꾼들이 도착하면 섬에는 신입생을 맞은 캠퍼스처럼 들뜬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하지만 작년 직원들은 미처 적응할 새도 없이 코로나19 때문에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직장이 문을 닫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발리가 국제공항 폐쇄를 선언한 건 3월 말이었다. 그날 섬 안의 주류상은 ‘코로나 프라이스’라며 할인가에 재고를 처분했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 신입 강사들은 아침부터 술을 진탕 마셨다. 여느 때처럼 짙고 따뜻한 대기, 울창한 정글, 멀리서 들려오는 원숭이떼의 소란이 그날 따라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다이빙센터의 칠판에는 아직 1년 전 마지막으로 보트가 만석이던 날의 스케줄과 명단이 적혀 있다.

동네에 모처럼 등장한 새 얼굴들
코로나 시대의 유일한 여행법인
해양 환경 코스 참가자들이다
이들 역시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
서울 아닌 발리의 삶은 어떠냐고
“새롭게 아닌 나답게 살아 좋다”

재개장을 앞두고 프로그램 주최 측, 인턴들, 가끔 다이빙센터에 놀러가는 나까지 몽땅 PCR 테스트를 받았다. 인턴들은 자카르타에서 5일간의 호텔 격리와 검진을 치른 상태지만 다시 피를 뽑아야 했다. 누사프니다는 아직 집단감염 사례가 없는데 갑자기 외국인들이 몰려와서 유료 테스트를 신청하자 의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방조치일 뿐이라는 말에 안심한 듯했지만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으면 꼭 다시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미리 도착해서 발리의 ‘힙스터 동네’ 짱구에서 며칠을 보낸 인턴은 누사프니다 선착장에 닿자마자 납치되다시피 병원으로 곧장 인도되어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그를 포함해 전원이 음성이었다. 앞으로 이 사람들은 접촉 인원을 최소화하고, 호흡기를 입에 물 때를 제외하면 마스크를 벗지 않고, 수시로 손을 씻어야 한다. 예전 같으면 파티도 많이 하고 친구도 잔뜩 사귀었을 텐데 이제는 소수정예 감금 입시학원 수강생처럼 살아야 하는 인턴들이 안쓰럽지만 그것이 코로나 시대의 유일한 여행법이라는 걸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북미와 유럽에서 온 참가자들은 긴 록다운 끝에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한다. 마침 기후는 전에 없이 다정하다. 작년 우기엔 비는 별로 안 내리고 바람만 거하게 불어서 다이빙에 지장이 많았다. 하늘은 칙칙하고 보트는 요동치고 물속 시야는 흐린 날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무덥지도, 습하지도 않게 화창한 낮과 시원한 폭우가 내리는 밤의 반복이다.

누사프니다의 유명한 산호 해변 크리스탈베이, 이곳에서 환경단체 인도 오션 프로젝트와 현지 다이버들이 산호 양식장을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누사프니다의 유명한 산호 해변 크리스탈베이, 이곳에서 환경단체 인도 오션 프로젝트와 현지 다이버들이 산호 양식장을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늘 받던 질문이 내게도 다시 쏟아졌다. “발리에서 사는 건 어때요? 당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사실 나는 이 질문에 지루한 답밖에 할 수가 없다. 날씨와 풍경을 제외하면 내 삶은 서울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 도시에서 월세를 벌려고 온갖 치사함을 겪으면서 아등바등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관두고 떠나와서 이렇게 산다면 확연한 변화를 느낄 거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서도 프리랜서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자취방 안에서 보냈다.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을 떠나 살면 관계 단절과 언어 장벽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시류에 뒤처지고 일거리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요즘은 한국 콘텐츠를 너무 많이 봐서 오히려 잡지사 친구들이 기획회의 주간이 되면 나에게 최신 관심사를 묻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친구들의 동태가 실시간으로 전시되고,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주 화상 채팅을 걸어오고, 인터넷 쇼핑과 카카오페이로 지인들의 경조사에 선물이나 부조금을 보내는 것도 당연해졌다. 그러니 관계 단절과 언어 장벽은커녕 집에만 있으면 만사가 편하고 즐거워서 외국어 실력이 향상될 틈이 없을 지경이다. 마감 몇 개를 치르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 내리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간 상태가 예사다. 가끔 눈을 반짝이며 “발리에 온 후 당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묻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제야 “어…그게…뭐가 바뀌긴 한 것 같은데 말이죠…” 더듬더듬 고민을 해볼 뿐이다. 오히려 ‘당신들이 내게는 자극입니다’라는 말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이빙 전문가 과정 수료와 산호 양식장 조성을 위해 방문한 인턴과 행사 주최 측 다이버들.

다이빙 전문가 과정 수료와 산호 양식장 조성을 위해 방문한 인턴과 행사 주최 측 다이버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사는가보다 무엇을 하는가다. 물론 나는 이 게으르고 지루하고 변함 없는 일상에 만족한다. 아니 그거야말로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 기대한 바고, 서울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다. ‘완전히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인생을 갈아엎을 거야!’라고 생각했으면 오히려 두려움에 발이 안 떨어졌을 것이다. ‘뭐, 일단 가보고 아님 말지’쯤이 새 삶을 시작하는 가장 적당한 온도일지 모르겠다. 물론 이제 막 발리에 당도한 사람들에게 딱히 와닿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백날 이렇게 말해봤자 어쩜 그렇게 용감하게 인생을 바꿨느냐, 나도 도시를 떠나고 싶다, 발리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 부러움을 가장한 푸념을 늘어놓는 친구들도 줄지 않는다. 코로나 시국에 접어든 뒤로 발리에 여행이라도 오고 싶다는 친구들의 울부짖음은 더 심해졌다. 그동안은 이런 울부짖음에 “언젠가 좋아지겠지”라는 덕담밖에 해줄 게 없었는데 최근 들어 조금 진전이 있었다.

해외 여행객을 다시 받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 발리에서는 2월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시노백 유효성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접종 2주차부터 신규 확진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발리는 아세안 지역 최초로 백신 접종에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도입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의료진, 공무원에 이어 관광업계 종사자가 초기 접종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누사프니다의 로컬 스태프들도 신청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5월까지 접종을 마칠 것이다. 내처 발리 일부 지역을 코로나 자유 지대(Free Covid Corridor(FCC))로 만든 후 외국인 관광객에게 개방한다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첫 시험은 요가와 전통 공예로 유명한 우붓, 고급 리조트 지대 누사두아에서 이루어지겠지만 감염 지도상에서는 이미 그린지대인 누사프니다가 다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FCC가 시행되더라도 당분간은 여행 기분을 한껏 만끽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외국인들에 대한 발리 사람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현지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관광업계 종사자들은 하루빨리 관광객이 돌아오고 경제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로 역병이 돌고 경제가 무너진 여느 나라처럼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높아졌다. 현지인들이 생계 곤란에 허덕이면서도 회복을 위해 필사적으로 방역에 협조할 때 마스크도 안 쓰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프라이빗 파티를 즐기면서 “물가 싼 발리로 놀러오세요”라고 SNS 포스팅을 올리거나, 정부와 경찰의 지침을 비아냥거리는 외국인이 마냥 좋게 보일 리 없다. 지난달에는 발리 여행책을 내고 트위터에다 파티 사진을 올리며 바이럴 마케팅을 하던 미국인이 록다운 시기에 부적절한 일을 했다고 지탄받은 끝에 이민국에 잡혀 추방당했다. 며칠 후에는 수영복을 입고 스쿠터를 탄 채 발리 부두에 뛰어드는 동영상을 찍어서 공개한 러시아 유튜버 커플이 같은 처벌을 받았다. 현지 풍속을 해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외국인들이 이목을 끌기 좋을 때고, 사람들은 지쳐 있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지극히 보수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그리고 바다에 물건 좀 버리지 말자. 스쿠터도 스쿠터지만 바다가 무슨 죄가 있나.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파티는 잊으라. 발리가 기다리는 것은 현지인들의 정서를 존중하고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조심스러운 여행자들이다.



[다른 삶]결국 남는 건, 어디에 사는가보다 ‘무엇을 하는가’다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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